아이가 RISD에서 만날 룸메이트: 미대 유학 포트폴리오가 놓치는 것

Chapter.1
‘합격 통지서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경쟁’


​해외 미대 합격 통지서가 도착하는 순간을 상상해 보셨을 겁니다.

모니터 앞 여러차례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마침내 합격 메일을 보며 아이와 함께 환호와 축하를 하는 그 순간이요. ​그런데 그다음 장면은 어떨까요?​

9월, 프로비던스의 기숙사. 아이가 짐을 풀고 있는데 옆 책상의 아이가 먼저 말을 겁니다.

그 둘은 소소한 자기소개를 통해 서로 같은 전공이라는 걸 알게 됐죠. 아이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 친구가 없을까 많이 걱정을 했는데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렇게 서로 신나게 학과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나누고 상상하며 어느덧 저녁이 되었는데, 아이의 룸메이트는 자기 노트북을 열어 고등학교 때 했던 프로젝트를 보여줍니다.

자신의 작업보다 정돈이 덜 된 느낌이지만 작품이 꽤나 강렬하고 생생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그 아이와 정말 어울리는 아우라 같은 걸 느꼈다죠.

아티스트 같았습니다.


반면 룸메이트는 아쉽다는 듯한 목소리로 1년을 이 작업에 몰두했는데 완성은 못한 실패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실패의 기록으로 이 학교에 들어왔다고 웃습니다. 또한 이런 작업들이 수십가지는 된다고 하고요.

​아이는 외장하드를 두고 왔다는 핑계로 자리를 마무리 한 뒤, 그날 밤 아이의 이불 속 안에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꿈틀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사실 한국에서 미대 유학을 준비한 후 해외 명문 미대에 입학한 많은 아이들이 겪던 불안감의 기록을 재조립한 이야기 입니다.

학교가 어디든, 그 옆자리엔 같은 아이가 앉아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미자기 프로젝트를 끝까지 실패해본 아이가요. 그날 밤 아이를 흔든 건 룸메이트의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체 무슨 훈련을 받고 온 걸까요?



Chapter.2
‘그 아이가 받은 훈련’

RISD의 지원 안내문을 열어 보면, 포트폴리오에 대한 요구가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완성작을 나열만 하는 게 아니라 "생각과 만들기(thinking and making)"를 보여 달라는 것. 제출작은 지원 학생의 아이디어, 호기심, 실험, 만들어 온 경험의 전 범위를 반영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에세이 항목에는 더 직접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표현에서 위험을 감수하는(take risks)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원자를 찾는다고요. 글쓰기 규칙을 벗어나도 좋으니 자기만의 입장을 내보이라는 겁니다.

​몇 해 전까지 운영되던 RISD의 자체 과제 안내문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습니다.

제출물을 "최종 결과물이나 기술 숙련의 증거가 아니라, 실험적 사고와 위험 감수의 연습으로 여기라."

입학처 관계자가 설명회에서 지원자들에게 반복해 온 조언은 더 짧습니다. 위험을 감수한 흔적을 보여 달라. 실패를 보여 달라.



그러니까 그 룸메이트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훈련을 받고 온 아이입니다.

무엇을 만들지 스스로 정하고, 자료를 뒤지고,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는 채로 실험하고, 막히면 방향을 바꾸고,

어쨌든 끝까지 가본 훈련. 그리고 그 과정 전체를, 실패까지 포함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훈련.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그 훈련을 지나온 아이에게 '실패'는,우리 아이가 아는 그 단어와 무게가 다릅니다.







Chapter.3
‘뒤집힌 문법’

여기서 불편한 이야기를 하나 해볼게요.

한국에서 미술을 준비해 온 방식의 문법은 대체로 완성도입니다. 흠 없는 소묘, 매끈한 채색, 심사위원의 눈에 걸리지 않는 마감.

12년의 교육이 훈련시킨 것도 같은 방향입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를, 정해진 시간 안에, 틀리지 않고 푸는 능력. 실패는 기록할 것이 아니라 ​감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에는 어른의 손이 닿은 자리가 있어도, 그것을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해의 합격작들을 나란히 놓고 보면, 서로 다른 아이들이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건너의 심사 테이블에서는 그 문법이 뒤집힙니다.

최근 포트폴리오 리뷰 현장을 정리한 보고들을 보면, 모든 작품이 흠잡을 데 없이 다듬어져 있는데 위험을 감수한 흔적이 하나도 없는 포트폴리오가 오히려 약점으로 지적됩니다.

심사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완성작과 함께 제출되는 스케치, 탐색 습작, 발전 과정의 실험들입니다.

생각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요.




12년 동안 감추라고 배운 것을, 이제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건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학부모의 선택이 틀렸던 것도 아닙니다. 제도가 길러 주는 능력과 그 무대가 요구하는 능력 사이에 구조적인 공백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그 공백은 제도가 메워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부딪히고 몰입하며 채워야 하고,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Chapter.4
‘대학에선 벼락치기가 안 되는 이유’

여기서 흔한 오해가 하나 생깁니다. 그럼 포트폴리오에 실패한 척하는 과정 컷을 몇 장 끼워 넣으면 되지 않느냐는..

안 됩니다.




심사자들은 매년 수천 개의 포트폴리오를 봅니다. 실제로 헤맨 사람의 기록과 헤맨 것처럼 연출한 기록은 결이 다릅니다.

유명한 작가의 톤앤매너가 그대로 느껴져서 마치 그 작가의 습작처럼 보이는 포트폴리오가 있는가 하면, 다양한 장르의 결과물을 만들었는데 작품마다 작가적 언어가 전부 다르다던지요. 둘 다 완성도는 높고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어떤 경험으로 이 생각에 도달했는지, 어떤 고민의 과정을 흔적으로 남겼는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과정 기록에는 막다른 길이 있고, 버린 방향이 있고, 왜 버렸는지의 판단이 있습니다.

그 판단의 흔적이 곧 사고력의 증거입니다. 먼저 헤매본 아이가 나중에 배운 것을 더 깊이 이해합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 본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 쯤 목격하는 장면이죠. 교육학은 이 현상에 생산적 실패(productive failure)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답을 먼저 배우고 문제를 푸는 것보다, 먼저 스스로 부딪혀 실패한 뒤에 배우는 쪽이 깊은 이해에 도달한다는 연구 흐름입니다.

실패를 통과해 본 학생은 다음 불확실한 과제 앞에서 스스로 계획하고 점검하고 조정하는, 이른바 자기조절 학습(self-regulated learning)의 힘을 갖게 됩니다.

이 힘은 몇 주짜리 특강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근육이 그렇듯,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에서 리서치, 실험을 지나 끝까지,

그것이 완성이든 실패든 통째로 겪은 시간만큼만 자랍니다. 그 시간 동안 아이는 기술만 느는 게 아닙니다.

막연함을 견디는 힘,

실패한 뒤에 다시 시작하는 힘,

자기 작업을 자기가 책임지는 감각이 함께 자랍니다.

미술의 기획과 완성 과정이 다른 어떤 과목보다 이 훈련에 적합한 이유입니다.





Chapter.5
‘그러나 불안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불안이 합격의 기쁨과 함께 저절로 사라지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뉴욕의 한 대표적인 미대가 공개한 통계를 보면, 신입생 네 명 중 한 명 가까이가 2학년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8년이 지나도 학위를 마치지 못한 학생이 한 학번의 3할에 이릅니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미국 대학의 중도 이탈을 분석한 자료들은, 떠난 학생의 상당수가 성적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실력이 모자라서 떠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낯선 언어의 교실에서 소속감을 만들지 못한 학생들이 짐을 싸고,

학교를 옮기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진짜 준비는,

들어가는 준비가 아니라 들어가서 버티고 자라는 준비입니다.


Chapter.6
‘그래서, 무엇부터 봐야 하는가’

그 룸메이트가 두려운 존재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아이가 받은 훈련은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이고,

경험은 설계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어떤 실험이 아이를 자라게 할지는 아이마다 다릅니다.

낯선 재료 앞에서 손이 먼저 나가는 아이가 있고, 계획이 서야 움직이는 아이가 있습니다. ​​

실패 앞에서 오히려 단단해지는 아이가 있고, 곁에서 버텨 줄 사람이 필요한 아이가 있습니다.

같은 과제를 줘도 자라는 지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를 목표로 할지보다 먼저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

그 질문에서 시작하는 준비가 어떤 것인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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